보도자료

[매일 파워 인터뷰] 류형우 대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 (2017.12.6 매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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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7-12-06 13:29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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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공연문화중심도시' 지정 충분한 인프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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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구는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음악 부문)에 가입했습니다. 이것은 대구예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국제기구로부터 인정받은 쾌거로서 시민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습니다. 유네스코 창의도시 가입을 계기로 음악 분야뿐만 아니라 무용, 미술, 문학 등 다양한 장르의 대구예술이 균형 발전을 하고 시너지가 될 수 있도록 대구예술인들과 대구시의 적극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류형우(59) 대구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이하 대구예총) 회장은 “공연장 숫자와 규모 및 시설 수준, 대학의 문화예술 전공자, 오페라`뮤지컬`월드오케스트라 등 특화되고 차별화된 축제를 비롯해 대구의 문화예술 인프라는 대단히 좋은 편”이라며 “특히 티켓파워(공연 매출)는 인구가 훨씬 많은 부산을 압도할 정도로 대구의 문화예술 수준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치`경제`사회 등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문화의 서울 집중 현상은 지역 문화계 발전의 최대 걸림돌이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시대적 과제라고 강조했다.

“국립예술단 5개 단체가 모두 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이 지난해 317회 공연을 했는데 이 중 310회를 서울에서 했습니다. 이쯤 되면 국립예술단이 아니라 서울예술단인 셈이죠. 또 있습니다. 대구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국립한국문학관 유치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정부는 ‘지역 간 경쟁이 치열하다’는 이유를 들어 선정을 무기한 연기했습니다. 요즘엔 서울 용산이 국립한국문학관의 적지라는 주장을 서서히 흘리고 있습니다. ‘서울 아니면 안 된다’는 이런 논리가 지방분권을 외치는 문재인 정부에서는 제발 바뀌었으면 합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이죠.”

류 회장은 대구문화예술의 미래를 위해 ‘공연문화중심도시’ 지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 부산은 ‘영화문화도시’로 막대한 예산이 지원된 반면, 지방에서 문화예술 인프라가 가장 뛰어난 대구는 외면받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공연문화도시 지정을 통해 무산되었던 CT공연플렉스파크(이우환미술관 부지)를 재추진함으로써 대구를 공연예술의 생산기지로 탈바꿈시켜야 합니다. 여기에다 문화기획자를 적극 양성하고 비평문화를 활성화시킨다면 대구문화예술계는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을 것입니다. 문화의 서울 쏠림은 서울 중심 문화로 획일화함으로써 한국문화계를 퇴보시키고 지역문화 발전에 역행하는 치명적 결과를 초래합니다.”

성공한 의사에서 문화예술인으로 변신한 류 회장을 만나 인생과 지역 문화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이렇게 살아선 안 되지!”

류 회장은 1959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선친의 고향은 군위군 소보면이다. 오래전 안동 하회마을을 떠나 정착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류 회장의 친척들은 군위와 안동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일찍 대구로 나온 선친은 서문시장에서 밥상`소반을 비롯한 각종 상(床)을 팔아 힘겹게 생계를 이어갔다.

“부모님이 서문시장에서 장사할 때 불이 두 번이나 났습니다. 불이 날 때마다 모든 재산을 날리고 거리로 나앉아 월세방을 찾아다녔습니다. 평리동에서 상에 쓰이는 나사못을 만드는 가내공업을 할 때도 불이 났습니다. 불이 날 때마다 셋방의 크기도 쪼그라들었습니다.”

빈번한 화재와 이사로 인해 류 회장은 대성초교, 평리초교, 대현초교, 대명초교 등 무려 4곳의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를 다녀야 했다. 중2 때 옥상 가건물을 빌려 대명시장으로 옮겨왔다. 어머니가 공장장이었고 1남 2녀가 직원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가내공업을 도와야 했다. 자정이 넘어야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환경 탓인지 모범생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호기심 수준이었지만 중학교 때부터 학교를 다니지 않는 친구들과 약간 불량스럽게 미도극장 주변을 휘젓고 다녔다. 내일을 위한 고민은 없었고, 오로지 벗어나고 싶은 오늘만이 계속되었다.

“고교 2학년 2학기 때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이렇게 살아서 내 인생이 어떻게 되지?’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몸이 약해서 몸으로 하는 일은 못 하겠고 공부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라는 절박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후 새로운 도전을 위해 친구들과의 관계도 과감히 단절했습니다.”

류 회장은 그 후 ‘누워서 잠을 자면 너무 오래 잘 것 같아 책상에 앉은 채로 눈을 붙였다’고 했다. 3개월쯤 공부에 집중하니 성적이 오르면서 "어, 하니까 되네!"라는 성취감도 생겼다. 지독하게 공부했지만 워낙 기초가 부족한 상태라 재수는 불가피했다. 절박함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공부에 지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류 회장은 경북대 의과대학에 당당히 합격했다.  

▶성공한 의사가 되다

2년 반의 벼락치기 공부로 의대생이 된 류 회장의 대학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당연히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진 못했다. 그래도 그 나름 열심히 해서 선전했다. 당시 평균적으로 의대생의 30% 정도가 낙제를 경험했다. 그런 상황에서 류 회장은 낙제 없이 의과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YMCA 연합서클 '여명'이라는 오락모임에 가입하기도 했다. 어느 날 선배가 다른 약속이 있다고 떠맡긴 페스티벌 사회자 노릇이 제법 인기를 끌었다. 당시에는 신입생 환영회, 졸업 페스티벌 등 페스티벌 문화가 유행했고, 행사 진행을 맡은 사회자에게는 사례비와 '한 상(床) 그득' 차려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술 고픈 친구들을 데리고 페스티벌 사회를 보러 다닌 것도 얼추 10회는 넘었다.

본과 3학년 후반기, 4학년 때는 학생대표를 맡았다. 기득권층에 대해서, 불의에 대해서 학생들의 의견을 학교 측에 용기 있게 전달하기도 하고 학생들의 소통과 화합에도 리더십을 발휘했다.

류 회장은 인기가 높았던 파티마병원 산부인과에서 전공의 과정을 밟았다. 성격상 외과 계열이 체질에 맞았다. 산부인과는 다이내믹하게 생명을 살릴 수 있고 또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도록 도와준다는 보람이 있었다. 그리고 개업하기 좋다는 장점도 있었다. 빨리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이번에도 전공의 대표를 맡았다. 1980년대 말 전국 최초로 전공의 처우 개선 투쟁에 나섰다. 덕분에 수술 중에도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개선되었고(그전에는 전공의들이 밥을 굶기 일쑤였다), 전공의 퇴직금 요구는 몇 년 뒤에 수용되었다. 1988년 의료노조 파업 때는 경영진과 노조의 중재자 역할을 맡기도 했다.

"환자를 볼모로 파업을 한다는 것에 대해 강한 반감이 생겼습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이런 행동은 정말 아니다 싶었죠. 노도 사도 아닌 입장에서 노조와 담판에 나섰습니다. 그해 12월 31일 극적으로 타협이 이루어졌고, 예정대로 저는 다음 날인 1월 1일 마산 파티마병원으로 파견근무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눈이 펑펑 많이도 내렸습니다."

전공의 자격을 취득한 뒤 안동병원 산부인과 과장을 거쳐 개인병원 경북산부인과를 개원했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병원' '병원 직원들이 자신이나 가족이 아플 때 찾아오는 병원'을 모토로 삼아서 의사로서의 사명감과 직무에 밤낮없이 최선을 다했다. 이후 4명이 공동 투자해 개업한 파티마여성병원도 아주 성공적이었다.

▶"일만 하다가 죽을 것인가?"

"개업을 한 뒤 2년째까지 밤낮없이 병원 일만 했습니다. 몰려드는 환자들을 외면할 수도 없고, 돈도 벌어야 했죠.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하다간 일만 하다 죽겠구나!' 하는 불안감이 덜컥 밀려왔습니다."

이때 지인이 사진을 권유했다. '자신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충고였다. 핫셀블라드 중형카메라를 구입해 출사를 다니면서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다. 틈만 나면 사진기를 들고 나섰고, 3년 만에 대구사진작가협회 회원 자격을 취득했다.

"눈으로 보는 세상과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은 달랐습니다. 개나리가 그렇게 예쁜 꽃인 줄 그때 처음 알았고, 하루가 그렇게 길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하루 만에 노고단 일출을 찍고 남해를 돈 뒤, 일몰까지 촬영하고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피곤했지만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2004년엔 대구 시지에 지역민들을 위해 문화공간을 열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0석 규모의 하우스콘서트 공간과 갤러리를 겸한 '예지앙'은 이렇게 문을 열었다. 매월 1회 콘서트와 2회 초대전이 무료로 개최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김규택 당시 수성구청장의 권유로 수성문화원장을 맡게 되었다. 당시 대구 8개 구`군 중에 수성구만 문화원이 없었다.

"도시형 문화원의 모델을 만들어 보겠다는 각오로 초대 원장을 맡았습니다. 백지에 그림 그리는 심정으로 열심히 사업들을 벌였던 것 같아요. 상화문학제와 고모령효축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요. 이민 열풍을 보고 나라 사랑의 정신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상화문학제를 기획했고, 현대판 고려장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것을 보고 효의 가치를 되새기는 자리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고모령효축제를 열었습니다. 상화문학제는 다양한 콘텐츠를 담은 지역 최초의 문학제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대구예총 회장이 되다

수성문화원을 책임지면서 자연스레 각계각층의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게 되고,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직책도 맡게 되었다. 대구문화예술계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도 하게 되었다. 2010년 대구문화재단 설립으로 인해 대구예총의 위상이 흔들릴 우려가 커지자, 주위 문화예술계 인사들로부터 '예총 회장 선거 출마'를 권유받았다. 선거를 순진하게 생각하다 보기 좋게 낙선했다. 낙선 후 대구음악발전포럼을 창립하며 꾸준히 노력해 2014년 제10대 대구예총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첫 선거에서 당선됐더라면 아마 지금처럼 모든 것을 걸고 대구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새 집행부를 출범하면서 '대구의 힘은 예술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는데, 대구예총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구예총이 앞장서 대구예술의 역사성과 우수성을 알리고, 대구예술인의 자존감을 높이겠다는 각오였습니다."

류 회장의 4년 임기는 NEWS(Narrow-Extend-Widening-Satisfy) 프로젝트로 정리할 수 있다. 시민과 예술인 사이, 예술인 간 간격을 좁히기 위해 소통과 화합에 앞장섰다. 영덕블루로드 예술인 한마음 걷기 대회, 예총축구단 창설, 대구예술상 시상식 및 예술인 어울림 한마당은 모래알 같던 문화예술계를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만들었다.

"예술인들이 잘 화합하지 못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선거 후유증이고, 두 번째는 혼자서 하는 예술 분야가 많다 보니 소통하는 방법 자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술인들의 뜨거운 마음을 누군가 엮어 주어야 하는데, 그 역할에 대구예총이 나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순수예술에만 매몰되지 않고 생활예술`대중예술`청소년예술로도 영역을 확장했고, 20년 이상 중국`일본 2개 도시에 머물렀던 예술교류의 폭도 몽골,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8개 도시로 대폭 확대했다. 10년간 제자리걸음을 하던 대구예총 예산을 3배 이상 확대함으로써 대구예술인과 대구시민이 만족해하는 문화예술이 되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대구청소년무대예술 페스티벌이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올해 3회째를 맞아 300개 팀 3천200여 명이 참여함으로써 전국 최대 규모로 발전했는데요. 개막식에는 무려 2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석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청소년축제로 키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청소년은 우리의 꿈과 희망이니까요."

▶인생 3막을 꿈꾼다

임기를 한 달 남짓 남긴 류 회장은 이제 더 이상 현직 의사가 아니다. 대구예총 회장 당선 이듬해 모든 걸 정리했다. 의사가 부족한 시대였다면 사명감 때문이라도 그만두는 것이 쉽지 않았겠지만, 요즘 생계를 걱정하는 의사가 있을 정도니 그만두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예총 회장 당선 후 집사람과 함께 여행 한 번 못 갔습니다. 그 나름대로 이룬 것도 있는 만큼, 이제는 비우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삶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가 있다면 '비워야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선친이 생전에 '뿌리를 찾아야 한다'며 안동 하회마을에 구입해 둔 고택을 조만간 수리할 예정이다. 대구와 안동을 오가며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슬로라이프와 미니멀리즘을 만끽한다는 구상이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사진첩 '하회마을의 사계'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류 회장이 다 비운 뒤 무엇으로 삶을 채워갈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석민 선임기자 sukmin@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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